237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돌면서 한일 우호 연대를 강화

누구나 어떤 직책에 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 한두 개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직 중의 버킷리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교토에 세 개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돌면서 한일 우호 연대를 강화하는 행사가, 나에게는 그 중의 하나였다. 11월7일 토요일, 드디어 세 개의 시비를 순회하며 참배하는 문화 행사를 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걱정이 많았다. 어제까지 청명하던 날씨가, 비 올 확률 80%로 변했다. 오래 전부터 기획한 행사가 비 때문에 망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마쳤다.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간간이 새 오줌과 같은 비가 내렸지만 행사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햇볕이 쨍쨍한 날보다 행사하기가 좋았다.

교토에는 윤 시인의 시비가 세 곳에 있다. 그가 숨진 지 50년이 되는 해인 1995년, 그가 다니던 도시샤대 캠퍼스 안에 첫 시비가 세워졌다. 11년 뒤인 2006년 그의 하숙집이 있던 곳(교토예술대학 다카하라캠퍼스 정문 앞 정원)에 ‘윤동주 유혼의 비’라는 이름의 시비가 세워졌고, 이로부터 11년 뒤인 2017년에 그가 학우들과 마지막 소풍을 갔던 우지강변에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졌다.

비가 있는 세 곳에서는 매년 주최자를 달리하는 추모행사가 벌어진다. 나는 부임 이래, 이들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각기 하는 행사도 의미가 있지만, 세 개를 한 번에 묶어서 하는 행사를 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여러 검토를 한 끝에 이런 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총영사관이 나서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봄부터 도시샤대의 시비 건립을 주도한 ‘윤동주를 추모하는 회’와 ‘도시샤코리아동창회’에 공동 개최를 제의하고 준비를 했다.

행사 참석 범위를 일부 열성 참석자에서 일반 참석자로 확대하고, 가급적 젊은이들의 참여를 늘리고, 한국과 일본 시민이 두루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코로나 감염 사태로 애초 계획보다는 규모를 축소했지만, 비교적 이런 뜻이 잘 반영된 행사가 되었다.

모두 60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오사카 등 교토 외 지역에서도 20여명이 왔고 일본 사람과 젊은이들도 만족스러울 만큼 참석했다. 버스 2대를 빌려 이동을 했다.

우연하게도 시비 건립 순서대로, 도시샤대 시비, 교토예술대 시비, 우지강가 시비를 탐방하는 순서가 되었다. 각 시비마다 헌화와 함께 전문가들의 생생한 현장 설명을 들었다. 윤 시인의 하숙집 터에 갔을 때는 그와 함께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된, 고종사촌형 송몽규의 하숙집 터도 함께 탐방했다. 몇 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사람의 하숙집 사이를 걸으면서, 당시 두 사람이 오가면서 나눴을 고뇌가 눈에 어렸다.

또 우지강가의 시비에 가기 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뵤도인(평등원) 근처에서 점심을 했다. 점심 뒤는 뵤도인 경내를 관람하며 사진도 찍고 환담도 나누는 외도도 살짝 했다.

오전 9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행사가 마지막 행선지인 우지강가의 시비에서 3시반께 끝나자, 모두 충만감를 느끼는 듯했다. 나는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느꼈다면 성공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올해 한 번에 그치지 말고 매년 정례적으로 행사를 이어가자고 말했다. 시인 윤동주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지만, 교토에 있는 세 개의 시비가 그를 대신해 한일 시민 사이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