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간 한국인, 민갑완: 한일 현대사의 백년한을 되새긴다
민갑완(閔甲完, 1897-1968)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젠 찾아보기가 힘들다. “백년한”(발행 1962)이란 그녀의 자서전이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었지만, 사후 46년이란 세월 속에 묻혀져 갔다. 민갑완, 그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민갑완의 생애: 한 여성의 삶
19 세기말부터 한반도를 노린 2차례의 한일 협약이 체결되고, 일본에 의한 한일 합방이 모습을 드러내던 1907년, 갑완은 만 9살의 나이로 조선시대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약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약혼한 직후 일본으로 건너 가게 된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기세를 더하면서, 약혼한 지 십여년이 지난 만 21살 되던 해에 갑완은 난데없이 약혼을 파기할 것을 강요당했다.
깊은 슬픔 속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안 시의(侍醫)가 조제한 약을 드신 직후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갑완은 만 22살 되던 해에 동생 천행을 데리고 상하이 망명 길에 올랐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 거주한 26년 동안, 일본의 감시를 피해 몇번이나 이사를 해야만 했다.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는 도망자와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약혼자 이은 황태자는 만 10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대부분의 생애를 일본에서 보냈다. 갑완이 상하이로 망명한 해에 쇼와 천황비 후보였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와 결혼한다.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20세기 전반은 약혼만으로도 결혼의 의미를 가지던 사회였다. 상하이 망명 시대에 갑완에게도 결혼할 기회는 있었다. 관심을 보인 남성도 여럿 있었고, 일본 총독부가 파견한 스파이를 비롯해 결혼을 권하는 주위 사람들도 있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중국인 여성 혁명가가 갑완에게 결혼할 것을 권고했을 때에는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문장 속에 배어 있는 깊은 우수와 고독은 이 책을 접하는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준다.
1946년 5월, 갑완은 고심 끝에 귀국을 한다. 이후 한국에서의 생활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50년, 자금을 어렵게 마련해서 시작한 사회 사업을 한국 전쟁이 일어나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로에 있던 사동궁이라는 양관에 몸을 숨기고 동생 가족과 가슴을 졸이며 폭격 소리에 떨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동생 가족과 함께 간신히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아버지의 고향 청주로 향했다. 북한이 다시 침공하리란 동생 천행의 걱정에 전쟁 후 주거지를 부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되짚어 보는 인생 기록
한일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그러져 버린 그녀의 일생은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한일 합방(1910년)으로부터 어언 백년. 갑완이 우리에게 남긴 “백년한”은 한 많은 여성의 인생 기록을 넘어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사와 국가. 그 속에 얽매여 사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한일 합방(1910년), 중일 전쟁(1937-45년), 한국 전쟁(1950-53년)이라는 잇따른 현대사의 동란 속에 휩쓸려 버린 갑완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역사적 사건의 의의는 한국과 일본에선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1910년은 한국에선 국권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일본으로 보면 영토 확대였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일본에게는 패전이며 종전을 의미한다.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든 한국 전쟁은 일본에게 특수 경기를 가져다 주었다.
“백년한”이 한 여성의 인생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현대사의 대사건들이 그녀의 일생에 관여했다는 아니, 갑완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는 것일 게다. 그녀의 자서전을 통해 보는 현대사의 한 장면, 장면들이 한일 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게한다.
Originally written in Japanese in 2009 and was translated into Korean by Chu 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