頭脳流出と同調圧力

真鍋叔郎博士(1931-)がノーベル物理学賞を受賞するや、日本のメディアはこぞって日本人のノーベル賞受賞として大きな見出しで扱った。そして、日本人の「頭脳流出」問題を指摘する。

だが、待てよ、「頭脳流出」って何だろう。日本人の優秀な研究者等が日本から海外に出ていくのをいうが、なぜそれを嘆かなくてはいけないのだろう。世界に出て行ったのだから、その分野における世界貢献だと考えられないのだろうか。

真鍋博士の場合は米国籍を取得している。その理由の一つとして「社会に同調する能力が欠けている」と言ったそうだ。彼の修論に注目した米国の研究者たちがすごいと思うが、彼らはもしかしたら日本の研究環境の窮屈さや不自由さをよく理解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まったく関係ないように思われるだろうが、雅子皇后の適応障害や眞子内親王のPTSDも同調圧力によるところが大きいのではないか。日本のなかでも皇室はとくにその圧力が大きいと想像するからである。

小説とブラウザの新しい関係を模索する「縦書き文庫」

7月中旬に縦書き文庫に出会った。誰でも簡単に創作小説等を投稿することができるサイトだ。運営者が開発した組版エンジンを2005年から無償で提供している。「小説とブラウザの新しい関係を模索するウェブサービス」と銘打ち、次のような独自の評価方法を採用している。その趣旨に共感し、すぐに拙稿「いつか名もない魚(うを)になる」を投稿したところ、思いのほか反響をいただいた。

縦書き文庫の主宰者は次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https://tb.antiscroll.com/

縦書き文庫では、ページ送りのみを根拠にした評価システムが徹底されています。
アクセス数、コメント数、お気に入り登録数などは、評価の対象になりません。
読者にページ送りされて初めて、読まれた字数に応じたポイントが加算されます。
正確なページ送りが可能な縦書き文庫だからこそ、実現できたシステムです。

縦書き文庫の魅力は利用者が登録さえすれば、その組版エンジンを無料で利用できることであり、操作が簡単で使いやすく電子書籍リーダーがなくてもスマホやPCで利用できることだ。文学作品を無償で提供する青空文庫の作品を縦書きにして投稿作品とともに載せることで掲載作品の内容と時代を広げている。

縦書き文庫という新たなサイトの動向に大いに期待したい。既存の出版業界にはない可能性がここにあると思うからだ。

『백년한』 그 후 이야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pp. 275-297

Quote

2013년 이방자 여사의 자전 기록인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지식공작소)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민갑완의 일생을 기록한『백년한』(1962, 문선각)을 접한 나는 의외로 조선왕조말의 상황을 직접 기록한 책이 많지 않고, 그 내용도 일제에 대한 감정적 비난이 많아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져 있음도 알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하려해도 후손들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몰락한 왕조의 후손이란 사실 때문에 직접 나서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평생 수절하며 마지막 황태자의 약혼자로 삶을 마감한 민갑완 여사의 후손을 찾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에 망명 후 평생을 의지하고 같이 지낸 남동생 민천식137)의 큰아들인 민병휘 씨(73)를 부산에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멀리서 보기에도 단아하고 차분하며 깔끔한 모습이 사진에서 본 민갑완 여사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극적 삶이 일반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8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 5면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동아일보≫가 축쇄판138)을 내자 민 규수의 옛 기록을 발견한 한 독자가 ‘민 규수가 동래온천동에 산다’는 제보를 했으며 이강현(초대 한국기자협회장 역임, 1977년 작고) 기자가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장조카 민병휘 씨는 “키가 크고 잘 생긴 호방한 기자가 부산에 와 고모의 파란만장한 삶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였다”고 회상한다.

지난 해 연말 민병휘 씨를 통해 더욱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2003년에 일본인 오구리 아키라(64, 도쿄 출생)139)씨가 찾아와 민갑완의『백년한』을 읽고 감동하여 일본의 과거사 반성 없음을 통탄하고, 일본의 양심적 지성을 깨우기 위해 한국어까지 배워가며 정현실, 추현숙 씨 등과 함께 공동작업으로 일본어 번역 출간을 10년간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재출간 소식에 뛸 듯 기뻐한 오구리 아키라씨는 올 3월 서울로 날아왔다.

오구리 씨와의 면담에서 그가 자비를 들여 상하이 암마시스쿨의 연감을 발굴한 얘기며, 동아반점과 유원로 삼층 주택, 여주로, 마지막 살았던 자오저우로, 보유리공원, 홍묘, 상해임시정부 청사와 남경로, 인천항, 1956년 살았던 부산 온천동과 장전동 자택, 덕수궁 중화전 등 책에 나오는 모든 곳을 수없이 답사하며 자료를 모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구리 씨의 노력을 보며 일본의 과거사는 용서할 수 없지만 오늘의 우리가 근대사를 어떻게 방치했는지 통렬히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의 제물이 된 세 사람

여기 구한말 ‘역사의 제물’이 된 두 여인과 한 남자가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과 그 약혼녀 민갑완 규수(1897∼1968), 그리고 황태자비로 정략결혼을 하게 된 일본 여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 1901∼1989)가 바로 그들이다. 강제로 얽혀버린 이들의 운명은 고독과 희생, 영욕의 고통으로 끝이 났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지략가 대원군은 26대 임금 철종이 후사가 없자 자신의 둘째아들을 입승대통(入承大統)시켜 왕을 만들었다. 이희는 그때 열두 살이었고 훗날 고종이 된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막겠다며 아버지 없는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하지만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본격적으로 권력투쟁을 하게 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해 열강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들의 첨예한 갈등이 없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친러 정책을 편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상궁 차림으로 장호원으로 탈출하여 한번은 죽음을 모면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눈엣가시가 되어 1895년, 결국 야만적인 일본에 의해 참살된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10년전 명성황후의 시위 상궁 시절 왕에게 승은을 입어 쫓겨난 엄비가 고종의 곁으로 다시 불려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영친왕)을 낳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140)

엄비는 1896년 2월 11일 가마에 고종과 이척(순종)을 숨겨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킴으로써 친일내각을 단숨에 엎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고종은 이듬해 덕수궁으로 돌아와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하여 황제국임을 선포했고 8일 후인 10월 20일(음력 9월25일) 최후의 황태자 이은을 낳았다. 이은(아명 유길)은 태어남과 동시에 황태자가 되었고 엄비는 황귀비가 되었다.

한편 이날 똑같이 태어난 닭띠 소녀가 바로 민갑완이다. 아버지는 여흥 민씨 삼방파 27세손 민영돈(1863∼1919)으로 명성황후와는 먼 조카뻘이 된다. 원래는 충청도 용정(지금의 청주)에 살던 민건호의 아들이었으나 민석호의 양자가 되어 열두 살에 서울로 올라온 총명한 인물이다. 동래부사, 주 영국·미국·벨기에공사, 승후관 등을 역임했고 육남매를 두었다. 민영돈은 아홉 살 아래인 순종 황제의 진명진사(글동무)를 맡을 만큼 황실이 신뢰하였다. 민영돈의 부인 이기돈(1869∼1928)의 집안 역시 명문가로 동생인 이기현과 이기서 등이 민영돈을 도와 고종의 밀서를 상하이로 가져가는 등 독립운동에도 앞장선 집안이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의 모든 지위를 찬탈하고 7월 20일 대신들만 모여 순종 황제에게 양위식을 열고, 8월 7일에는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하지만 이은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란 명목으로 황태자 책봉과 동시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다. 그때가 열한 살이었다.

운명일 뿐, 미워하지 않겠다

그해 3월 14일, 민영돈의 딸 민갑완은 이미 세자비로 간택되었지 만 이날부터 열한 살 소녀의 끔찍한 불행도 같이 시작되었다. 궁중법 도에 묶여 이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게 되었고, 일제의 끝 없는 회유와 가문에 대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민갑완은 열한 살에 세자비 간택단자를 받고 10년간 약혼지환을 간직했지만 이미 이방 자와 정략결혼을 당하게 된 황실은 민갑완에게 신물을 돌려달라는 파혼 통보를 한다. 민영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민갑완과 이은 280 은 열한 살 간택 때 딱 한 번 본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141)

일제에 짓밟힌 억울한 운명의 민갑완은 이방자를 한 번도 미워 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고결함을 끝까지 유지한다. 민병휘 씨는 “어려서부터 자식 을 대신해 고모와 한 침대를 쓰며 온갖 귀여움을 받아 누구보다도 오 랜 시간을 보냈다. 내 기억으론 단 한 번도 일본이나 이방자 여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내가 영친왕의 생활을 시기하거나 그분을 미워하고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한다 해도 난 두렵지 않을 정도로 그분을 저주하거나 미워한 적은 없었다.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명인 국운과 정략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누구를 미워 하거나 탓할 수는 없다. 방자 여사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행복했을 지 몰라도 국가적인 면에서는 불행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약소국가 의 황태자와 결연을 맺는 것이 그리 만족스럽거나 자랑스럽지는 못 했을 것이다. 더욱 원수처럼 첩첩이 쌓인 한일 양국 간의 감정의 틈 바구니 속에 끼어 있는 그의 심정 역시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하 면 때로는 인간적인 면에서 동정도 가는 것이었다. -민갑완,『백년한』에서

그 점은 자전 기록 속에 비친 이방자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한 때 이은의 마음 깊은 곳에 민 규수가 있지 않나 고민해 본 적도 있었 던 이방자는 여인으로서 민갑완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졌던 것 으로 보인다. 더구나 첫아들 진을 잃었고 외아들 이구마저 2005년에 후손 없이 죽음을 맞이한 걸 보면 두 사람에게 자식과의 인연은 없었 던 셈이다.

순종황후 윤 대비가 승하하신 지 2년 뒤인 1968년에는 영왕 전하의 약혼자였던 민갑완 규수가 역시 71세를 일기로 부산 동래에서 별세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사와 정치의 제물이 되어 똑같이 희생당 한 여인으로서 늘 미안한 마음이 들고 친근감과 동정이 생겨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만날 기회가 없이 그분이 별세하신 것이다. 기우는 나라의 황후가 되어 평생을 혼자 사신 것이나 다름없는 윤 대비님, 마지막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는 죄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독신으로 살다 가신 민 규수님의 비극은 내 설움과 합쳐져 나는 울 고 또 울었다. -이방자,『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에서

두 사람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강요된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서 느끼게 된 깊은 절망감과 안타까움도 거의 비슷하다. 민갑완은 검 은색 한복을 즐겨 입었고 알아보는 사람들을 피해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외출하곤 했다. 142) 자서전 발간 후 여론의 관심 속에 1963년 영 화화된 <백년한>(동성영화사, 이종기 감독, 도금봉·김승호·최무 룡 출연)이 부산에서 상영되었을 때도 차일피일 다음에 보겠다며 자 택인 동래 온천동 근처 삼류 영화관까지 오도록 끝내 보지 않을 만큼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해방이 되고 광복이 되었다고 기뻐 날뛰면서 귀국을 서두르건만 여리고 약한 여자의 몸으로 오로지 내 일신만을 감추고 피하기에 허구한 날들을 버리고 청춘만 허무하게 늙어버렸 으니 이제 고국이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내 딴에는 한국 여성의 절개와 우리 민씨 가문의 정절을 보여 세계 만방에 표본을 만들고 자 내 자신 인고의 생활을 해왔으나 이것이 조국 광복에 어떠한 영 향을 주었단 말인가?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게 주어진 슬픔 은 오히려 강물처럼 흘러 고독은 노을과 같이 더욱 짙어만 갔다. 슬 픔도 기쁨도 다 사라져버린 오늘…. 내게 남은 것은 다만 허탈한 인 생의 기록뿐이다.(중략) 나도 그분에게 바라는 단 하나의 희망과 소 망은 있다. 우리는 피차 이조 말엽의 인간제물이거늘 누구를 탓하 고 원망할 수는 없다. 내가 몇십 년을 살든 몇백 년을 살든 그분도 꼭 내 사후까지 살기를 비는 것이다. -민갑완,『백년한』에서

Photo 38: 1963년 민갑완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었다. 주인공 도금봉에게 옛 머리 모양에 대해 자문 을 해주고 있는 민갑완(사진 위). 영화 <백년한>에서 민갑완이 세자비에 간택되는 장면 (사진 아래 왼쪽). 당시 부산극장에서 만든 홍보용 부채. 민병휘 소장(사진 아래 오른쪽).

Photo 39: 영화 <백년한>의 한 장면. 큰외삼촌, 동생 천식과 함께 배를 타고 조선을 떠나는 장면(사진 위).민갑완역을 맡은 도금봉과 암마시스쿨 교장 미스 샐리 역을 맡은 외국인 배우(사진 아래).

이방자 역시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운명을 저주했다. 한편으 론 남편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부부의 귀국 후 민갑완은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간의 기대 를 갖고 집수리를 하는 등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영친왕은 이미 식물 인간이 되어 평생 수절의 의미가 빛을 잃게 된다.

선·일 융화의 대역이라니. 여러 가지 습관이 다른 외국에서 외국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서 잠 못 이루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밤이면 뜰에 나와 차라리 이대로 밤의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사라 져 버렸으면, 아무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으면 하 고 절실히 원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초상집 같은 슬픔과 우 울에 싸여 있는 집안을 위해서 나는 빨리 안정을 찾지 않으면 안 되 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약혼자가 된 이은 전하에 대해 생 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도 자기 의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 한 사실이다. 나를 얼마나 미워하실까. 한창 응석 부릴 어린 나이에 인질과 같은 입장으로 일본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또 어머니인 엄 비(嚴妃)의 최후도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그분도 나와 같은 희생 자라는 친근감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이방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에서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권한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 로아누크대학교에 다니던 의 친왕을 보필했다. 이런 인연으로 6·25 이후 의친왕 사동궁 양관에 서 민갑완은 거주하게 된 것이다. 한 편 상하이에서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나서지 못했지만 황실에 들어갈 교육을 10년 동안 받은 규수 로서 민갑완의 단정한 처신과 이승만의 구혼 등 여러 구혼자를 물리 친 절개를 더 큰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143) 도 있다.

상하이 조계를 떠돌다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2년간 영국공사를 마치고 1903년 귀국한 후 1904년 11월 장례원과 시강원 업무를 맡아보았다. 1905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가까운 친척인 병조판서 민영환이 자결하자 관 직에서 물러난다. 1907년 세자비로 간택단자를 받고 약혼을 하였으 나 파혼을 종용 당하던 와중에 1919년 1월 화병으로 사망에 이른다. 민영돈은 육남매를 두었으나 민갑완의 손위 두 딸은 첫 번째 부인인 남씨 소생으로, 큰딸은 이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무탈한 삶을 살았다. 둘째 딸은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 덕영의 둘째 며느리로 출가하였으나 부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이 책에 쓰인 대로 민갑완과의 사이가 각별하여 ‘계동언니’라고 불렀으나 상하이 망명 후 출가한 언니들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고 한다.

민영돈의 첫 부인 사망 후 시집을 온 부인인 이기돈은 민갑완의 어머니로 1906년 학수고대하던 첫아들 민천식(1906∼1968)을 낳았 다. 민갑완과는 아홉 살 차이다. 민천식의 아명은 천행으로 이후 그 의 삶은 온통 민갑완을 모시는 극진함과 희생으로 점철된 파란만장 한 삶이었다. 민갑완이 두고 온 동생 민억식(1909∼1936, 아명 만행) 은 휘문고보와 경성제대 예과를 다니던 수재로 청주 한씨 가문의 처 녀와 약혼을 한 상태에서 맹장염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는 병이 나자 서둘러 파혼함으로써 자신의 누나와 같은 불행을 만들지 않으 려 신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민억식의 두 살 아래 여동생인 민만순(1911년생)은 안동 김씨 가문의 김익한과 결혼 하였고 2남 2녀(승동, 석동, 영애, 영숙)를 두었다.

민갑완은 다섯 살에 사부를 모시고 천자문을 떼는 등 유교의 가 르침과 침선, 요리 등 궁중여인으로서 수업을 엄격하게 받았다. 그 러나 파혼 이후 민씨 가문이 겪은 고난은 일제 치하 어떤 가문보다도 말할 수 없이 컸다. 큰외숙 이기현144) 은 민갑완 가족에게는 상하이 망명i생활을 지탱해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고, 김규식을 통해 민갑완과 민천식을 암마시스쿨145)에 보내 신식 교육을 시키는 등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다. 1936년 경 이기현이 상하이에서 병으로 숨졌을 때 민갑완의 절통함은 극에 달했다. 이기현의 큰아들 이강하는 동생인 민천식과 동갑이었는데 상하이에서 같이 살며 이선웅(아명), 이황웅 (아명), 이헌재(전 경제부총리)를 낳았고 독립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민갑완의 장례식에 이강하의 부인이 장지까지 따라갔으나 그 이후 내왕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민갑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단연 민천식 가족일 것이다. 강제 파혼으로 조선 시대 말의 제물이 된 민갑완과 공동 운명 체가 된 민천식은 중동학교를 다니다 1922년 경 상하이로 망명한 후 일제의 탄압으로 암마시스쿨 마저 중도에 그만두고, 외삼촌 이기현 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이기현은 상하이버스공사 지배인을 맡으며 민천식을 교육했다. 또한 민천식은 영국인 의사에게서 의학을 배웠으나 정식으로 의사가 되지는 못했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의지가 굳 었던 민천식은 졸지에 가장이 되어 영국공사관의 공무국에 취직을 했고 모진 고생을 했다.

이기현이 사망한 후 민갑완은 천식의 배필로 파평 윤씨 가문으로 마포 서강 일대 땅 부자의 딸 윤정순(1917∼1996)을 맞아들여 상하이에서 같이 살게 된다. 요리와 뜨개질, 바느질 등 못하는 게 없었던 민갑완은 그 솜씨를 스무 살이나 어린 손아래 올케 윤정순에게 물려주었고, 이는 며느리 박무선(67, 민병휘의 부인)에게 전수되었다. 윤정순은 힘든 살림 속에서도 민갑완을 평생 ‘국모로 모셨다’고 한다.

민갑완이 딸처럼 아끼던 민천식의 큰 딸 민병순(1936∼1984)은 시인이자 수필가로 외가의 영향으로 귀국 후 가톨릭학교 계성중학교를 다니다 한국전쟁 때 청주로 피난을 가서 청주여고를 졸업하였다. 민병순은 한전 부산 남부지점을 다니며 가정살림을 도왔으나 급 성간염으로 사망했다. 민천식의 2남 민병욱(1947∼1998)은 해군 출 신으로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1남 1녀(정기, 영주)를 두고 당뇨합병 증으로 사망했다.

민갑완은 동래온천장과 마지막 임종지인 장전동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다. 6·25를 겪은 후 흰 나카오리 모자를 쓴 말끔한 차림의 민천식이 피난지 부산의 그 유명한 40계단을 지나다 길을 묻는 미군에게 발탁되어 미국공보원에 취직을 했지만 인민군 치하에서 고생 한 기억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환도하지 않고 1955년부터 부산에 남아 살았기 때문이다. 6·25 때 북으로 끌려갈 뻔하다 광복군 이범석 장군과 같이 탄 해방 귀국선에서 의료처치로 구해준 사람이 “민선생, 동트기 전 도망가라”고 놓아주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서 울로 돌아갈 마음을 버린 것이다. 민천식은 국제 가톨릭 구호단체 (NCWC, 1960년대 한국전후 빈민 구호)에서 일하다 말년에는 성분 도병원 직원으로 봉직했다. 1968년 2월 5일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홀로 3남매를 키우던 윤정순은 혈압과 당뇨로 1996년에 사망했다.

민갑완의 실질적 마지막 후예가 된 민천식의 큰아들 민병휘는 1941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1946년 환국할 때 다섯 살이었는 데 어린 시절 쓰던 유창한 중국어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다. 민갑완 가족은 전쟁 통에 경기도 광주의 선산 마을에서 숨어지내 다 1·4 후퇴로 2년을 청주에서 살다 부산으로 내려갔다. 민병휘는 부친의 희망대로 군 제대 후 1966년 초대총장인 동아대학교 정재환 박사에게 발탁되어 2001년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동아대학교와 동 아대병원에서 교직원으로 성실하게 봉직했다.

민병휘는 “고모님은 일반 여인들과는 달리 늘 깃 넓은 흰 동정을 단 한복을 항상 정갈하게 입으셨고 남의 나쁜 점을 조금도 말하지 않 았어요. 오직 가족의 안전을 위해 평생 불교를 믿으셨고, 내가 군대 에 간 1963년도에 크게 손가락을 다치자 ‘모든 것이 덧없다’며 온천동 성당에서 김알릭스 신부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정도로 가족을 사 랑하셨다”고 증언한다. 갑완의 세례명은 민아가다이다. 146) 민병휘는 은행원이던 박무선과 결혼하여 1녀 2남을 두었고, 부산시 금정동 금 곡에 산다.

Photo 40: 1968년 2월 23일의 민갑완 영결식. 오전 10시 부산 장전동 고인의 자택을 떠난 장례 행렬 모습. 3대의 경찰차와 6명의 동래여고생들이 펴든 태극기 그리고 영정이 행렬을 앞섰고 수녀 300명이 뒤따르는 등 비교적 성대하게 치러졌다.

Photo 41: 동래천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용호동 묘지로 향하는 민갑완의 장례 행렬.

2014년 4월 16일 부산에서 다시 만난 민병휘 씨는 부산역 앞의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에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해주었다. 영어와 중국어, 한학에 능통한 민 규수가 가끔 끽연을 하였고 어린 시절 담 뱃갑에서 본 공작이나 아리랑 상표가 기억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후두암이 걸렸지만 항상 상처부위 소독도 자신이 하는 등 깔끔한 면 모를 잃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중국 음식으로 썩힌 두부요리인 ‘쵸우 뚜우푸(臭豆腐)’를 좋아하셨지만 자신은 어리다고 주지 않았기 때문 에 1992년에야 부인과 대만 여행을 가서 먹어보았는데 냄새가 심해 도 너무 맛이 있어 고모님 생각이 나 울컥 했다고 회상한다.

꽃도 좋아하고 책 읽는 것과 금정산 자락의 금강사에 불공드리는 것, 팥밥과 불고기를 즐겼고 요리도 아주 잘해서 그 맛과 냄새를 잊 지 못한다고도 했다. 쇠고기의 부위별 세세한 조리법은 궁중음식 수 준이었다고 한다. 무를 넣은 쇠고깃국은 물론이고 닭고기카레라이스 까지 직접 조카들에게 해 먹이고 귀마개, 양말까지 털실로 짜서 모든 옷을 해 입힐 만큼 솜씨가 좋았다고 그리운 마음을 전한다. 강아지는 셰퍼드와 포인트, 일본종 찡, 온몸이 털투성이인 개 등 후두암으로 타 계하기 전까지 다섯 마리를 키웠다. 닭을 못 잡는 올케에게 “닭은 못 잡는데 먹을 줄은 아나?”하면서 손수 닭을 잡아 요리를 하는 바람에 윤정순도 결국은 닭 잡는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특히 민병휘 씨는 다섯 살 때 상하이에서 고모와 한 침상을 쓰며 유성기 판 5개를 트는 심부름을 했었는데 1930년대 유행가는 물론이 고 클래식과 고국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한다. 민갑완은 세간 의 추측과는 달리 어린 시절 ‘난봉’ 별호처럼 힘든 나날 속에서도 실 293 제 모습은 활달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주로 이광수의 『사랑』, 『원효대사』와 정비석의 소설은 물론 여성지 <여원>, <아리랑> 등을 매달 구독했고, 책 대여점의 책을 모두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6·25 때 명동성당에 문화재급 물건들을 맡겨 두었는데 인민군 이 모두 털어갔다고 한다. 경제사정이 나빠 중국에서처럼 차를 마 시지 못해 부산의 깡통골목에서 어렵사리 약간의 커피를 구해 가끔 마시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았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6·25가 일어 나는 바람에 사회사업을 위한 모든 준비는 허사가 되었고 1950년대 는 민천식 가족에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시기가 되고 말았다. 민갑완은 자서전에서 ‘동생에게 얹혀사는 미안함’을 여러 차례 토로 하고 있다.

1958년 6월 29일 ≪동아일보≫ 보도 이후 각지에서 민갑완의 절 개를 높이 평가하고 돕겠다는 독지가들이 나타났지만 이런 반응은 1년도 못 갔다. 그 해, 동아대학 권모 교수가 민갑완이 당시 온천동 방 두 칸에 월세 2천환짜리 집에 사는 모습을 보고 ‘후생주택에 이사 시켜 교육사회사업을 함께 한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웬일인지 1964 년 경향신문 10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그마저도 잃고 사기를 당한 사연이 나온다. 1963년 8월에 상영한 영화 <백년한>의 대본료 45만 원을 받지 못해 오히려 빚을 지는 등 유명세를 치른 고통도 보인다. 회고록에 말년의 10여년간 일들이 소상히 기록되지 못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예의가 깍듯하고 조용한 성품의 장조카 민병휘 씨는 고모 민갑 완의 일생을 한마디로 “이 세상에 단 한 분, 이런 사람은 있을 수 없 다”고 표현한다. “어느 누구 탓도 한 번 안 하고, 이것이 나의 운명”이 라며 “무서울 정도로 삶을 긍정한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고 회고했 다. “인생이란 파도의 그래프에서 남에게 척지지 말고 후의를 베풀라”는 말, “당대에 내가 저지른 업보는 반드시 내가 받는다”는 부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조선과 민갑완에게 저지른 과거사를 사 죄하고 일본의 죄 없는 후손이 천벌을 받지 않도록 진심으로 뉘우쳐야 할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의 백장미

민갑완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김을한은 자서전『무명기자의 수기』(1984, 탐구당)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처녀인 만큼 절대 남의 집에서 죽게 하지 말고, 수의는 옛날 선비처럼 남복(男服)을 입히고 나의 영구 뒤에는 모든 사람이 나의 슬픈 생애를 알 수 있도록 구슬픈 조가(弔歌)를 연주해 달라.”

민갑완의 부탁처럼 그의 생애를 압축한 듯한 노래가 있다.

울었다고 시든 꽃이 또 다시 피어날소냐 불 꺼진 밤거리를 헤매다니는 눈물의 백장미

Photo 42: 부산 용호동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던 민갑완의 묘비석 뒷면. 1897년 9월 25일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묘지는 개발로 인해 수용되어 없어겼고, 유골은 실로암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Photo 43: 부산 용호동 천주교 묘지에서. 큰조카 민병휘(오른쪽), 올케 윤정순(가운데), 작은조카 민병욱(왼쪽).

흘러 간 첫사랑을 희망의 등불 삼고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 장미는 외로워 불렀다고 지난 꿈이 또 다시 돌아올소냐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마저 왜 울긴 왜 울어 지난 날 행복한 날 꿈속에 그려보며 쓸쓸하게 웃어본다 낯선 거리서 눈물의 백장미

이 노래는 가수 안다성이 불러 히트한 ‘눈물의 백장미’ 147) 란 노래 다. 당시 첫 직장 동아대학교에 다니던 민병휘 씨는 고모가 “노래가사가 자신의 삶을 꼭 닮았다”며 평소에 그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에 장례식 때 “장송곡으로 틀어 달라”는 유언을 지켜 부산지역 위수사령부 소속 군수기지사령부 군악대가 동래 온천동에서 온천성당을 경유, 장지인 천주교 용호동 묘지까지 조곡으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그 묘지는 수용되어 민갑완은 지금은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실로암공원묘역 납골묘에 민천식, 윤정순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평소 성품대로 수의까지 직접 마련한 민갑완은 죽음을 예견한 1967년 12월 1일, “운명은 고독해도 쓸쓸한 것은 나는 싫네. 남복 입혀 화장한 후 해운대 바다 깊이 뿌려 물고기와 동무하게 해주오”라고 유언했다. 민갑완 규수, 영친왕, 이방자 여사 그리고 민영돈의 돌아가신 후예들. 부디 무거운 역사의 짐을 내려놓고 하늘나라에서 평범한 인간의 자유와 아름다운 평안을 얻길 기원한다.

김정희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엮은이)


137) 이 부분부터는 본명 민천식으로 표기한다.

138) 1958년 6월 ≪동아일보≫(사장 최두선)는 창간호부터 1928년까지 신문 축쇄판을 만들었는데 한 독자가 1920년 4월28일 자 “왕세자 전하와 혼의가 있었던 상중의 민 규수” 기사를 보고 제보한 것이다.
139) 오구리 아키라(小栗章)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출신으로 1973년부터 한국어를 배워 대한항공 도쿄지사 기획실을 거쳐 1987∼1989년 일본국 외무성 재토론토 총영사관 영사(문화·교육 담당)를 역임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재단법인 국제문화포럼 치프 프로그램 오피서(한국어교육사업 개발)로 일하며 ‘일본고등학교 한국어교사연수회’, 일본고등학교 한국어교육네트워크에 헌신하여 주일본 대한민국대사관 공로상을 받았다.

140) 황현은『매천야록』에서 엄비를 “얼굴이 민후와 같고 권략도 그와 같았으므로 입궁한 후 크게 총애를 받았다. 국정을 간섭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민후가 있을 때와 동일하였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엄비가 보통 이상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1) 민갑완의 삶을 다룬 여러 저술이 마치 이은과 이방자가 민갑완을 외면하고 안 만나 준 것처럼 쓰고 있으나 귀국 후 이은의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하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태였다.

142) 혼다 세스코,『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 범우사).

143) 안천,『대한제국 황통쟁투사』 (2009, 교양과학사)에서 다소 격정적인 견해를 내고 있 다. 이승만이 양녕대군파로서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처신이라는 것이다. 입헌군주적 발상은 매우 이례적인데, 민병휘는 “외국 유학으로 매우 개방적 태도를 지닌 이승만이라면 청혼을 할 수도 있었겠다”며 고모로부터 이승만의 청혼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144) 1902년, 의양군 이재각(1874∼1935)의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 대관식 참석을 기록 한 수행원 리종응의『서사록』에 주영 공사 민영돈과 이기현(부인 이기돈의 동생)이 배웅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기현은 민영돈의 비서였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통역관이기도 했 다. 1906년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민영돈을 수행하여 상하이로 가서 독립을 호소했으 며,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145) 오구리 아키라가 상하이도서관에서 발굴한 학교 연감에 의하면 미국인 교장 한나 샐리(Hannah F. Sallee)가 운영하는 암마시스쿨은 초중 고대학을 모두 갖춘 교육기관이었다.

146) “임종 하루 전 영세를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민병휘 씨는 “원래 외가쪽이 가톨 릭에 많은 신부와 수녀를 배출했기 때문에 개종 권유를 오랫동안 받아왔다. 임종 4년 전 후두암이 생겼고, 1963년 이후 개종했다”고 전한다. 불교든 점사든 가톨릭이든 민갑완에게는 ‘종교는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그다음 순위’였다.

147) <비나리는 호남선> B면 두 번째 곡. 오아시스레코드, 1963년 발매. 가수 안다성은 1931년 충북 청주 출신.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로 유명한 지성파 가수로 지금의 경희대, 당시 신흥대학 영문과 졸업 후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을 좋아하여 예명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안영길. 매력적인 부드러운 저음으로 부른 이 노래는 박춘석의 작곡으로 민갑완이 가장 좋아했던 곡이다. 안다성은 팔순을 넘은 나이에도 공연무대에 선다.

Unquote

Oguri Tadamasa 1827-1868

小栗忠順に関心を抱いたのは最近のことで、以前は歌舞伎の小栗判官ぐらいの知識しかなかった。小説「福澤諭吉」(岳真也著)を読み、徳川幕府の幕僚として福澤諭吉や勝海舟とともに咸臨丸に乗り、ワシントンで米国政府と交渉し、後に横須賀造船所を設立したこと、勝海舟と対立関係にあって、福澤が彼を慕っていたことなどを知った。

明治政府軍との徹底抗戦を主張した小栗が、勝海舟や西郷隆盛の主導した<無血開城>への時流のなかで、いわば当時の政界を去って帰農したにもかかわらず、斬首刑に処せられたと知り、その理不尽さに憤り急に親近感を抱いたのである。というより、一方的な明治史観を押し付けられることに強い違和感を覚えた。同姓という親しみもなくはないが、まったくの偶然である。

Quoted from the first chapter of “the Meiji Restoration Losers” written by Michael Wert (Harvard East Asian Monograph 358).

On the morning of the sixth day of the fourth intercalary month in 1868, imperial troops escorted Oguri Tadamasa from his temporary imprisonment to the banks of the Karasu River in Mizunuma Village. Typically, capital punishment for a high-ranking samurai, especially a direct vassal of the shogun, involved ritual gesture of suicide before an executioner’s coup de grace. That day, however, Oguri was forced to bend over, hands tied behind his back.

Besides calling the man who dared push his body forward with his feet a “disrespectful lout,” Oguri’s final words were a request to let his wife, daughter-in-law, and mother go free. A low-ranking samurai struck Oguri’s neck not once but three times before his head dropped unceremoniously into a pit. A villager who witnessed the execution as a boy recalled, “What was most impressive in my mind was how white the soles of his tabi appeared when the body fell forward.”

This scene weighs on Oguri’s commemoration, coloring explanations of his career up to the moment. It marks the origin of his commemoration both geographically, as ground zero for the historical memory about him, and temporally–almost immediately after his execution, former colleagues became his first apologists, protecting his legacy in death though they could not help him in life. The goal of this chapter is to impart a historical understanding of Oguri and clarify why memory activists and supporters found him a compelling figure worthy of appropriation.

小説の冒頭のように鮮やかな光景が浮かぶ。著者のいう memory landscape (仮に「記憶の風景」と訳しておく)の一端がこれか、と思わせる書き出しである。

JBpress 佐藤優氏インタビュー記事

[以下 JBpress の記事より転載しました。下線ほか編集]

作家・佐藤優が読み解く、菅首相がじんわりと怖いのはなぜか

緊急事態宣言とオリンピック開催が両立する菅首相の頭の中の論理 2021.7.9 (金) 長野 光follow

「民主主義の消費期限はもう切れ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と話すのは作家で元外務省主任分析官の佐藤優(さとう・まさる)氏だ。コロナの封じ込めに成功した中国を見て、非常事態への対応には非民主な体制の方が強いのではないかと多くの人が不安を抱いた。民主主義が崩壊し、独裁のような形に変わっていくほど、私たちの社会や経済は追い詰められた状況にあるのだろうか。

ウラジーミル・プーチン、習近平、ドナルド・トランプ、金正恩など11人の独裁者を解説する『悪の処世術』(宝島社新書) を上梓した佐藤氏に話を聞いた。(聞き手:長野光 シード・プランニング研究員)

(※記事の最後に佐藤優氏の動画インタビューが掲載されているので是非ご覧ください)

恐怖政治の仕組みを上手く作ったプーチン大統領

──数々の政敵や反体制派をむごたらしく葬ってきたロシアのプーチン大統領こそ、現代の危険な独裁者というイメージにぴったりといった印象を受けます。プーチン大統領の人間性について教えてください。

佐藤優氏(以下、佐藤):反体制派に毒を飲ませたり、記者を殺したりしてもプーチンに得はありません。ロシアは直接選挙ですし、ロシア国民は知的水準も高い。そんな乱暴なことをしたら大統領に当選できません。「プーチンはバカだ」というプーチン観がありますが、そこまでバカな奴が20年以上も権力を握れるはずもない。

 一度、「ロシアは怖い」という価値判断を外してロシアを見てみたら面白いですよ。国会議事堂に乱入して銃乱射するような国が民主主義国だと本当に言えますか。ロシアだってロシアなりの基準で民主主義国なんです。

ウラジーミル・プーチンの大戦略』(2021年7月発売予定、東京堂出版)の著者、アレクサンドル・カザコフは僕のモスクワ大学の同級生で、プーチンの側近グループの一人です。

 この本ではデモクラシー(民主主義)が機能しなくなって、今の世界のトレンドはフォビアクラシー(phobiacracy、恐怖政治)だと言っている。プーチンは恐怖政治の仕組みを上手に作っています。忖度の構造を作るのが上手い。そして、日本にもフォビアクラシーがあります。

──日本の今の政権に恐怖政治の要素が見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か。

佐藤:菅さん(菅義偉首相)はかなり怖い。彼がやっているのは、完全にフォビアクラシー(恐怖政治)です。少しでも反発する者が出てきたらバサッと切りますから。あれだけ頼りにしている尾身さん(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対策分科会・尾身茂会長)だって、近々切られる可能性が十分あると思う。

菅首相がオリンピックに固執する論理

佐藤:オリンピックをやめたら自分の政権が潰れる。だから権力に固執していると考えると菅さんという人を読み違える。オリンピックをやれば感染者が増え、世界の変異株がたくさん入って来るなんてことは彼も百も承知でしょう。

 菅さんはこのコロナの中権力に空白が生じることで政治や経済に混乱が生じないように自分がやり続けることが唯一の選択肢だと信じている。そして、安定か混乱かどちらを取るかと考えた場合に混乱を避けるためにはオリンピックに突入せざるを得ないから苦渋の選択をする、と。

政治は究極の人知を超えた世界にあります。ヒトラーだって、最初から独裁者になると思っていなかった。最初は国民に選ばれた、と思う。その次に神様に選ばれた、と思うようになる。菅さんも神がかり的なところがあると思う。本人でさえ総理大臣になると思っていなかったんだから。今、このコロナ禍の日本で首相をやっているのは自分の天命だと思っていると思う。

彼は究極の現実主義者ですよ。河井克行(元法相)や河井案里(元参院議員)は、ガネーシャの会で菅さんの応援団だった人です。菅原一秀(前経済産業相)や吉川貴盛(元農相)、自分に近かった総務官僚、自分の息子も誰も守らない。単に冷たいというレベルではなく、「混乱を避けるために、申し訳ないけど事実だったらしょうがない、責任を取ってもらうしかない」という思想で切り捨てる。これは官僚や政治家としては怖いですよ。

──「ルールを破ったら仲間であろうと容赦しない」という姿勢は、国民の側からすると公正なもので悪くないようにも思えますが。

佐藤:そう思います。コロナの予防接種も思うように進んでいないし、オリンピック開催の不安もあるにも関わらず、菅政権の支持率は30%ある。これはかなり高い。

 混乱への恐れ、そういう感覚は国民の中でかなり強いと思います。今の政権が素晴らしいとは思わなくても、安定か混乱かだったら国民は安定を選択する。ただ、この安定か混乱かという選択は、ともすれば独裁を是認する方向に行きかねません。

もう一人の“独裁者”、習近平はどう見る?

──長い一人っ子政策の末、人口動態がいびつになった中国。成長が難しくなり、社会や経済の問題に政治が対処できなくなる時、次に民衆の心の拠り所になる可能性として宗教を想定している習近平は、先回りしてキリスト教をはじめ、外国の宗教を体制内部に取り込もうと目論んでいる、と書かれています。習近平政権は自分たちの作り上げたカルチャーが、宗教によって変容される可能性を恐れないのでしょうか。

佐藤:そもそも共産党体制自体に、理想的な社会を作っていこうという宗教的な要素があります。今までのような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や毛沢東思想によって体制を維持できなくなったら、帝国を維持するために民心を安定させる宗教を取り込もうとするのは必然です。

 でも、中国国内の地下教会や法輪功、「イスラム国」(IS) 等は、極端に政治化して共産党体制とぶつかるから困る。矛盾せずに並存できる宗教といえば、カトリック教会です。

カトリック教会は、旧東欧の共産圏とも中南米の独裁政権とも上手くやってきました。今はまだ司教の任命権の問題があり、バチカンと手を握れていませんが、共産党体制に反発せずに社会問題を処理するという点ではカトリックが魅力的です。

 それから、創価学会(創価学会インターナショナル)の活動も同時に公認す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創価学会は、日本では戦時中、軍部と対立していましたが、今は自公政権の中で与党化しています。中国共産党政権の中で与党化することも可能ですよ。

──日本では創価学会は公明党を持っています。創価学会を大々的に取り入れる場合、中国政府は政治に関与してくる可能性を懸念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佐藤:そうは思いません。一国二制度の下で、香港とマカオでは創価学会インターナショナルの活動は認められています。それから、中国の各大学には池田思想研究所があります。創価学会が政治活動をしているのは日本だけで、世界百数十ヵ国の創価学会インターナショナルは政治活動をしていません政治との関係においては折り合いをつけやすい教団なんです。

トランプが勝ちを想定した民主主義のゲーム

──「私は低学歴の人たちが好きだ」と言い放ったトランプ大統領は、下品さを見せびらかすことで、大衆にこいつは気取っていないと思わせて引きつけた。トランプの強さは支持者がカルト化したところにある、と記されています。なぜ米国人は理想主義者のサンダース氏より、ヒールレスラーのトランプ氏をより熱狂的に求めたのでしょうか。

佐藤:政治は論理だけではなく感情で動きます。トランプは安定した支持者さえ掴んでいればこのゲームに勝てると計算していた。最後まで選挙結果を認めなかったことも、次の大統領選挙を考えれば正しいやり方です。

 民主党はトランプの逆打ちばかりしています。イランで対話を再開し、イエメンのフーシ派のテロ組織指定を撤回し、アフガニスタンからの米軍撤退に関しては政策がぶれました。

もっとも、アフガニスタンから米軍が撤退しても、米国の民間戦争会社が国際機関や米国企業を防衛しています。軍服からガードマンの服に変えているだけで、本質的な違いはありません。

──トランプには政治家になって実現したい具体的な事柄が存在しない。「アメリカファースト」はそのような国づくりを理想としているのではなく、自己表現の一つに過ぎない、と書かれています。政治をエンターテイメントにできるのが不真面目な政治家の強みだと思いますが、これは危険なことでしょうか。

佐藤:危険だけど止められない。ウクライナのゼレンスキー大統領は元コメディアンです。「大統領」というテレビドラマに出たら大ヒットして、その勢いで大統領になっちゃった。プロレスみたいになってるんですよ、民主主義って。

 そうなると民主主義以外の選択肢、恐怖政治の方が国民は幸せなんじゃないか。そういう発想も出てくる。

──民主主義が崩壊して独裁のような形に変わっていくほど、現在は追い詰められた状況だ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

今後生まれてくる社会主義でも共産主義でもない体制

佐藤:中国はコロナを封じ込めることに成功している。この意味は相当に大きい。民主主義の消費期限が切れ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でも社会主義は、ソビエト型の社会主義の負の遺産のせいで無理です。そうすると、恐らく出てくるのは一種のファシズムでしょう。国家の暴力を背景にして、雇用を確保して、経済的な再分配をしていくという思想です。

──コミュニズムを装ったような形で、ということですか。

佐藤:利潤を追求する起業家精神は尊重するという点では、コミュニズムとは違います。経済は統制しないで競争はやらせる。でも、競争の成果物は取り上げて、貧しい人々に再分配する、というやり方です。中国は比較的近いと思いますが、共産主義という看板を掲げなくなると思います。

日本で言うとまず、年収3000万円くらいまでの人はいてもいい。でも、年間10億円、20億円稼ぐ奴からは全部召し上げて資産に課税する。消費税はがーんと上げる。それを原資として再分配し、最低700~800万円の世帯収入は皆に保証する、というイメージです。

──米国のような超富裕層の少ない日本では、資産家に大きく課税するという考え方は都合がいいと考える人は少なくないかもしれないですね。

佐藤:今のところは事実上、MMT(現代貨幣理論)で世の中が動いてしまっているわけでしょう。いくら国債売っても大丈夫なんだ、と。あれは絨毯にガソリンを撒いているようなものです。すぐに火はつかないけど、朝鮮半島や台湾海峡の有事等、国際情勢によって一気に火がついて極端なハイパーインフレになります。

その時、MMTだと、増税で対応す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るけど、そんなことが短期間でできるのか。そうなると、リバタリアン(自由主義)的な発想じゃなくて国家が乗り出してくると僕は思う。

──金正恩には求愛を恫喝で示すという独特な表現様式が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当たり屋のようにトラブルを持ち込み、恫喝し困った相手を交渉の場に引きずり出して、注文をつけて相手が少しでも譲歩したら儲けもの、というあの質の悪いやり口を金正恩総書記はどこから学んだのでしょうか。

「北朝鮮の人々は今の北朝鮮にそこそこ満足している」

佐藤: 金日成や金正日の時には北朝鮮から輸出するものもあったし、第三世界の支援もしていた。金日成の主体思想に惹かれる人もそれなりにいました。金正日の時はリビアにトンネルを掘っていたし、土木工事なんかで儲けていたんです。

 ところが、国連の制裁が加わって、だんだんそういう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ハッキングして仮想通貨を盗むとか犯罪国家的になっていった。ある意味、北朝鮮に対する制裁が効いてるんですよね。

 ただし、核兵器を持っているから、迂闊なことはできない。北朝鮮は自分の身を守るために、核兵器が米国に到達するような形にしておかないといけない、と思い込んでいます。特に、大陸間弾道ミサイル(ICBM)の多弾頭化に成功すれば、北朝鮮の安全は保障され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北朝鮮は貧乏ですが、朝鮮戦争直後に比べて人口が増えているし、1990年代後半に多くの餓死者を出した「苦難の行軍」の時期と比べても豊かになっています。

 北朝鮮のキャリアパスでは平壌に住むのが頂点だし、農村から地方の中核都市に移ることによって人の移動がある。それを目指して頑張るから、あの体制内でも、みんなそれなりに幸せにやっています。閉ざされた環境の中で、たとえ低い生活水準でも人々はそれを甘受して、そこそこの幸せを感じる、ということは十分あるんです。

──「私が20世紀の独裁者の中で最も興味を持っているのが、アルバニアに君臨したエンベル・ホッジャである」と本書で書かれています。日本で一般的に語られる国際政治の主要な人物の中では比較的マイナーな存在ですが、なぜこの独裁者に格別の興味を示されるのでしょうか。

佐藤:政治家にとって一番重要なことは、国民を飢えさせず食べさせることです。アルバニアは荒れた土地の小国なのに、エンベル・ホッジャは自力でちゃんと生き残って国民を食わせることができた。大したものです。しかも、ソ連や中国と喧嘩しながら衛星国にならず、バランスを取っていた。本来だったらユーゴスラビアに吸収されてしまうような小さい国ですからね。

──エンベル・ホッジャが尊敬していたのは、鉄の規律で民衆を徹底的に押さえつけ、平等な世界を実現しようとしたソ連の独裁者ヨシフ・スターリンでした。アルバニアもロシアもその後、破滅的な辛い時代に突入しますが、それは過度な理想主義者に無理に矯正された反動でバランスを崩して転倒した結果のように見受けます。完璧な世界の実現を目指す真面目すぎる政治家もまた、ならず者以上に危険な存在なのでしょうか。

究極の自己責任社会だった旧ソ連

佐藤:理想で世の中を動かそうとしても短期間しか動かない。最後は恐怖で動かすしかないし、理想的な社会を作るには恐怖政治になる。ただ、恐怖政治だとしても、その仕組みが機能している限りにおいては長期間続くんです。

 ソ連はある意味で、非常にいい社会でした。共産主義の理想である「労働時間の短縮」が実現されていました。1日3時間くらいしか働かない。土日は2回休むし、夏休みは2ヵ月ある。クーポン券が労働組合から配られるから、夏の間はリゾートホテルでみんな遊んでいたんです。

──生活が安定して様々なものが享受できたとしても、人々は精神的に幸せにはなれないのでしょうか。

佐藤:旧ソ連はそれなりに幸せだったんです。住宅はタダで分けてくれる仕組みがあって、普通の労働者は別荘を持っていた。郊外のログハウスに10人くらいで集まって、手作りの料理を持ち寄って飲んで・・・。全然悪くない、楽しい生活ですよ。

 別荘に集まってタイプライターで詩や作品を作ることもありました。どんな反体制文書でも、製本して20部作って配るくらいは全然問題ない。日本の学術論文の読者だって、実際は3人くらいでしょう。知的な活動をしている人は、20部程度発行できれば満足ですよ。

一人の人が一生の間に知り合える人は150人で、人事評価をきちんとできる人数は8人だと言われています。人というのは10人、15人の人がいればわりと満足なんです。今の日本の場合、10人、15人の友達に会いたいと言っても難しいでしょう。仕事で都合つかないとか、収入に余裕がなくてカツカツだとか。

──競争志向型の人は、ソ連時代はどうしていたのでしょうか。

佐藤:ソ連のエリートはハイリスク・ローリターンだったんです。腐っていない卵を買えるくらいの特権しかなかったんです。国家の指導的な立場になっても、政争に巻き込まれてシベリア送りや刑務所送りになるリスクがあった。でも、そこそこの生活でよければ政争に巻き込まれることはない。

しかし、人々はミネラルウォーターやビールを飲む時は、光にかざしてチェックする必要がありました。品質管理がないから、ネズミのうんこが入っている可能性がある。それを飲んで腹を壊しても自己責任、だからみんな一生懸命に目を凝らしていた。究極の自己責任社会だったんです。

今の自由民主主義を守るには

──不安が多い社会では、強くて賢くて大いなる何かに導かれたいという願望が人々の間で高まりやすくなる。民主主義による意思決定のシステムが面倒に思えてくる。民主主義のシステムの綻びが大きくなり始めた今、20世紀の妖怪たちが息を吹き返そうとしている、と本書の冒頭で書かれています。この底流にある問題意識を教えてください。

佐藤:私は自由民主主義を守りたいと思う。

自由になると格差がつきすぎるけど、平等にすると競争がなくなって息苦しくなる。自由民主主義というのは、異なるベクトルの間で折り合いをつけていきます。その折り合いをつける基準は、フランス革命の自由、平等、友愛というスローガンの友愛ではないか。

では、その友愛はどう作られるのか。率直に意見を交わして、信頼が積み重なっていくと、その信頼関係がある人たちの間では、折り合いがつけられる。そういうネットワークを、自分の手が触れられるチャンスがある時に作る努力を怠らないこと、それが大事だと思う。(構成:添田愛沙)

無宗教派が支配する社会

国家神道に対する反動からか「無宗教」であることがよしとされ普通とされた戦後の日本社会において、神社での祈祷は「信仰」とは違うものとされ、正月にはみな神社にお参りするまた、葬儀や法事には僧侶に読経(どきょう)してもらい念仏を唱えることが、死者に対する(とむら)いであり儀礼だとみなされた。いずれも「信仰」とは異なるものとして扱われた。

何かを「信じる」者は無知愚昧(ぐまい)のやからとされ、「宗教」にすがる者は弱者としてうとんじられる。だから、「信仰」を説き、宗教団体に勧誘する者はうさん臭いものとみなされる。長いあいだ「宗教」について考えることを禁止された人々は、何も信じられなくなっていた。神も仏もこりごり、宗教など無用の長物と考えていた。それが普通のことと考え、誰も疑おうとはしなかった。

彼女はなぜ「学会員」になったのか

1959年4月、31歳の彼女は創価学会に入会した。当時、人々はその会を「学会」と呼び、会員を「学会員」と呼んできらった。「無宗教」が普通とされる戦後の日本社会において、「信仰」を持つ人々は敬遠された。その状況はいまも続いている。

そんな風潮のなか「学会員」となることは、「宗教」を持つと同時に人々が習俗として取り込んできた既存の神仏しんぶつを否定することを意味した。1950年代後半から60年代にかけて「学会」が全国的に展開した折伏しゃくぶくという名の布教活動に人々は戸惑い反発した。その宗教運動が他の宗派と宗教を邪宗じゃしゅうとし、家々にあったかみふだを破棄したからだ。そんな手法が人々の反感を買い、世間から「病人と貧乏人の集団」としてさげすまれ排斥はいせきされた。

なぜ彼女は「学会員」になったのか。周囲の人々にうとんじられ、夫に嫌われてまでして、なぜ「学会」にこだわったのか。「学会員」になることが彼女にいかなる変化をもたらし、夫の内面にどんな変化を引き起こすのか、少年の生き方にどう影響するのか、予想などしなかったろう。三十代初めの彼女自身、必死だったろうから。「学会員」となった彼女の生涯、少年の目に映った一人の女性の生きざまを描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

人々がスマホを身体の一部のように扱い、インターネットでつながれた現在も同じ状態が続いていると言ったら、筆者は変人扱いされるだろう。でも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ンヴィーニたち

自民党の憲法改正草案に欠けているもの

自民党の憲法改正草案2012

現行憲法の前文が持つ格調が見事に失われているのはなぜだろうか。いろいろ重要な語句が挿入されていて、一見すると網羅的な感じを受けるのだが、いかんせん格調がないのである。

文章の格調というのは後で取って付けられるような修辞的なものではない。その文章を書いた人々のめざす理想やそれを支える思想が作るものである。この草案に欠けているのは、まさにそれではないか。

知識も見識も有する面々が執筆されていると思うが、残念ながら、浅学非才の僕にはその格調が感じられないのだ。

202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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